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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11호] 묘하디 묘한 발전과 시간 사이의 관계

2018-03-02
조회수 839

묘하디 묘한 발전과 시간 사이의 관계


 ‘사람을 꽃피우는 발전’의 내용과 형식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발전이라는 개념에 내포되어 당연시 여겨지는 여러 의미를 의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발전이라는 평범한 단어와 얽혀있는 여러 의미에 대해 많은 문제제기가 나오고 있지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발전=산업화=양적 성장’의 공식이다. 우리는 산업화를 통해 국가의 부가 증가한다고 해서 시민들이 골고루 잘살게 되는 것은 아니며 물질적인 풍요가 언제나 시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경험적으로 안다. 계층과 세대, 성별 간 극심한 불평등이나 민주성의 결함, 사회적 부조리와 편견 등은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원인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물질적 풍요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양적 성장을 넘어서는 발전과 개발 개념을 위해 환경, 성차, 참여와 평등 등 다양한 질적 요소들을 발전과 개발에 대한 논의 안으로 포괄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발전에 내재한 여러 가지 의미 중 상대적으로 성찰적인 논의가 진행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발전 개념에 내재해 있는 ‘시간’의 의미이다. ‘사람을 꽃피우는 발전’의 내용과 형식은 바로 이 ‘시간적’ 의미를 고찰할 때 더 풍부하게 채울 수 있다.  

근대적 의미의 발전은 공동체의 개성과 특성을 더 큰 단위로 통합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각기 다른 지방의 언어들은 국어로 통일되고 공동체의 문화는 민족적 문화로 통합되며 삶을 위해 영위하던 다양한 생산 활동은 임금노동이라는 단일한 형태로 통합되었다. 시간도 이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시간의 표준화와 보편화는 이 모든 발전의 전제조건이었다. 근대화 이전의 시간은 개인과 지역에 종속되는 개별적인 것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양을 키우는 사람과 몽골에서 말을 키우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동물의 삶에 적합한 시간을 살아갔으며, 절기의 흐름에 영향을 받는 농부와 맡은 일을 정해진 시간 안에 완수해야 하는 도시의 대장장이는 각기 다른 시간을 살아갔다. 산업화 초기 유럽에서도 시간이라는 것은 개인과 가족, 공동체 사이에서 서로 다르게 통용되었다. 같은 가내 수공업자들도 일하는 시간은 제각각이었고, 서로 다른 일을 하다가 납품 날짜에 맞춘 ‘벼락치기’식의 작업도 성행했다. 이렇게 각자가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 시대에 산업화는 가능하지 않다. 근대적 발전으로서의 산업화는 투입에 대한 산출을 계산할 수 있어야 하고, 집단적이고 동시적인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며,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용해야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편익 계산과 집단적 노력의 바탕이 되는 보편적인 시간, 그리고 시간의 사용에 대한 통제가 필요한 것이다. 오로지 하나의 시간만이 존재해야 하며 이 시간으로 모든 것이 측정 가능해야 한다. 도시에만 세워졌던 시계탑은 마을 속으로, 가정으로 들어가더니 사람들의 손목에 수갑처럼 채워졌다. 노동의 양과 생산성도 시간으로 측정되고,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도 일률적으로 적용된다. 누구나 같은 시간을 공유하기에 시간은 결국 돈이 되고 시간을 지키는 것은 윤리가 된다. 이것이 현대의 ‘발전’에 미치는 영향은 지금 바로 시계가 사라진다고 상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표준화되고 보편화된 시간 위에 현재의 발전 개념이 서 있는 것이다.  

표준화되고 보편화된 시간은 근대적 의미로서 발전의 전제 조건일 뿐만 아니라 종종 발전의 수준을 측정하기 위해서 쓰인다. ‘발전한 곳’과 ‘발전하지 못한’ 곳 사이에 우리는 시간을 부여한다. 일 년에 이만큼이나 생산할 수 있는 곳과 일 년을 꼬박 일해도 이만큼 밖에 생산하지 못하는 곳 사이에 다시 수십 년의 시간 차이가 매겨지는 것이다. 근대화 시기에 자연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과거로의 여행이었다. 이제 막 베트남 남부의 어디쯤 도착하여 메콩강을 따라 깊은 크메르 왕국의 밀림으로 들어가는 혈기 넘치는 프랑스 식민탐험가 앞에 놓여있는 길은 근대 이전으로 난 길이었다. 그가 향하는 시간은 자신의 조상이 살았던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을, 발전 이전의 시간이다. 산업혁명의 열기와 미래의 부를 향한 쟁투로 가득 찬 시끌벅적한 도시에서 온 그에게, 자연은 말 그대로 원시 상태이다. 더 깊숙한 자연 속으로 들어갈수록 그곳과 그가 항해를 시작한 도시 사이의 시간적 거리는 점차 멀어진다. 마침내 그가 자연의 힘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앙코르와트를 발견했을 때 그는 수백 년 전으로 돌아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크메르의 땅은 그가 살고 있는 동시대, 즉 19세기를 살고 있었지만, 현재의 그가 발견한 것은 과거의 시간이다.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 여행을 한 셈이다. 앙코르의 폐허를 딛고 미소 짓던 그는 미래에서 온 사람인 것이다. 16세기 이후 식민주의자들은 이렇듯 과거로 회귀하는 일종의 지리적 시간 여행을 계속해왔다. 이 과정에서 발전과 시간 사이에 묘한 관계가 만들어진다. 착각은 현실이 되어 ‘발전하지 못한’ 크메르의 땅과 ‘발전한’ 프랑스 사이에는 수백 년이라는 시간 차이가 발생했다. 산업화된 곳과 그렇지 못한 곳 사이에는 단지 지리적인 거리가 있었을 뿐이지만 이 거리를 측정하는 단위는 시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미개한’ 혹은 좀 부드럽게 ‘전통적인’ 사회라는 명칭이 이들 시간의 거리 너머 사회들에게 유행처럼 붙여졌고 유럽은 스스로 이들의 미래가 되었다.  

식민화 이후 냉전 시대를 풍미하였던 근대화론은 한마디로 체계화된 ‘발전의 시간 이론’이었다. 이 이론은 시간으로 매겨진 발전 단계를 정형화하고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위한 방법을 설파하였다. 이 이론에서 지리적으로 다른 곳에 위치한 각각의 공동체는 각기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모든 공동체는 각각 전통 사회, 도약을 위한 준비, 도약, 성숙, 고도의 대량 소비 단계 중 하나를 거치고 있다고 전제된다. 이들 공동체 사이에 지리적 차이는 시간으로 환산되고 저발전 단계의 공동체들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미래에 먼저 도달한 어른에게 배우면 된다. 여기에서 어른들은 물론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산업화된 국가들이다. 이 발전 이론을 요약하자면 ‘과거에 살고 있는 저발전 국가의 사람들에게 우리가 가진 현재의 지식과 기술을 통해 미래를 주자‘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을 메타포로 쓰고 있는 발전의 시간 이론이 역사의식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수히 지적되었다. 산업화된 국가들이 산업화하기 위해서, 즉 어른이 되기 위해서 아이들로 표현되는 과거의 식민지들을 무참하게 희생시켜 온 역사는 기억되지 않으며, 백 년 전의 미국이 쓰던 방식을 백 년 후 멕시코가 써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근대화론은 발전을 둘러싼 이론적 공방의 뒤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이 이론은 마치 늙은 병사와 같이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 노병이 남긴 유산은 우리의 개발 행위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많은 한국인이 개발도상국을 여행하면서 스스로 다른 ‘지역’이 아닌 다른 ‘시간’에 왔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간 위대한 프랑스 식민탐험가 정도는 아니겠지만 우리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여기는 70년대 한국 같아”, “여기는 80년대 서울 같아” 하는 말을 끊임없이 읊어댄다. 우리 스스로 다른 공동체들 사이의 지리적 ‘거리’와 문화적 ‘차이’에 시간으로 점수를 매기고 우리가 그들의 미래임을 자처하는 셈이다. 한국이 해외에서 수행하는 개발 행위도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의 개발원조는 ‘과거에 살고 있는 저발전 국가의 사람들에게 우리가 가진 현재의 지식과 기술을 통해 미래를 주자‘는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다. 이 사고를 기반으로 원조의 목표를 만들고 사업을 수행하고 성공과 실패를 가늠한다. 개발도상국이 현재 살고 있는 시간을 우리의 시간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쯤 근대의 발전 개념에 내재된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발전, 그들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발전, 다른 시간을 인정하는 발전은 가능할까?

한국의 개발원조는 특히나 과거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원조를 하는 이유를 물으면 “과거에 우리가 받았으니 이제는 줘야 할 때”라고 한다. 게다가 막상 줄 때는 새마을운동과 같은 지극히 과거의 것을 주려고 한다. 개발원조는 과거를 전수하는 것도 아니고 과거에 받았으니 해야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다양한 사람들의 숲으로 들어가 그들이 가진 미래를 배우고, 함께 일하면서 공동의 미래를 꿈꾸는 것이 되어야 한다. 앞에서 말한 근대의 산업화와 진보가 주는 희망에 취해있던 프랑스 식민탐험가는 그 점을 보지 못했고, 그 대가는 참혹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 안에 깊이 내재해 있는 이 묘하디 묘한 발전과 시간 사이의 관계를 극복하는 일이 시급하다. 사람을 꽃피우는 발전의 내용과 형식을 만들어 가기 위해 발전을 위한 시간보다는 발전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중요한 이유이다.
 


기사 입력 일자: 2017-11-22

작성: 장대업 서강대 국제한국학과 교수, 발전대안 피다 전문위원
/ daeou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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