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과 사람들[17호] '사람이 꽃피는 발전의 길 - 제6회차 다름, 다양성, 관계편' 후기: 세상에 쉬운 관계는 없다

2018-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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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꽃피는 발전의 길 - 제6회차 다름, 다양성, 관계편' 후기

세상에 쉬운 관계는 없다
- 다름, 다양성, 관계에 대한 나와 너, 우리의 고민


지난 10월 11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다름, 다양성, 관계에 대한 사람이 꽃피는 발전의 길 여섯 번째 행사가 있었다. 이야기 소재는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라는 책이었는데, 이 책은 서로 다른 환경에 있는 사람들의 만남과 그로부터 나오는 여러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다. 관계와 다양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는 좋은 마중물이었다. 자리도 자리고, 사람들도 사람들이니만큼 책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도 개발협력에 대한 이야기로 수렴하는 모습을 보았다. ‘다름, 다양성,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넓게 다루기 위해 글을 두 꼭지로 나눴다. ‘관계와 개발협력’에서는 행사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위주로, ‘우리의 다름, 다양성’에서는 다양성과 한국 사회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위주로 정리했다.


1. 관계, 그리고 개발협력


▲ '사람이 꽃피는 발전의 길 - 제6회차 다름, 다양성, 관계편'에서 그룹 이야기 중인 참가자들 ⓒ 발전대안 피다


관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나왔던 주제는 ‘관계가 우리에게 주는 부담’이었다. 우리에게 타인과의 관계란 쉽다면 한없이 쉽게, 어렵다면 한없이 어렵게 만들 수 있는 것임과 동시에, 내 시간과 노력과 마음을 들여야 하는 대상이다. 적당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기에, 우리는 속에 담아둔 진심을 요령껏 감추면서 관계를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나간다. 필요하다면 요령을 발휘하여 내 마음이 내켜 하지 않는 사람과도 잘 지낼 수 있는 것이다. 책 속 쇼코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예의 바른 웃음, ‘혼네와 다테마에’[1] 처럼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관계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우리는 관계를 인맥 관리, 일의 연장선처럼 여기며 ‘효율성’을 따지기도 한다. 특히 관계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면서도 ‘모든 사람에게 잘해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은 섣불리 무언가 할 수 없게 만든다.  카톡 읽고 무시하기처럼, 책 속 한지와 영주의 사이처럼, 때로 그런 관계는 쉽게 손에서 빠져나가고, 그냥 그대로 묻혀버린다.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 생기는 문제는 국제개발협력에서도 똑같다. 결국 인간이 꾸려가는 세상, 맺는 관계의 속성은 같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리라. 


그룹 논의에 참여한 참가자 중 다양한 국제개발협력 분야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가능한 한 들었던 그대로 모아보려고 한다. 첫 번째 이야기의 주제는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사람들 간의 관계 그리고 사업을 함께 하는 국가와의 관계였다. ‘직장의 팀장과 팀원 간, 혹은 개발협력을 나누는 두 국가 사이에 수평을 지향하는 관계가 가능할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내가 자유로움을 느끼고 자유롭게 상대를 대할 때, 과연 상대도 나와 같이 느낄까? 들어‘주는’ 것, 해‘주는’ 것이 되어버리는 내 말과 행동의 무게에 대한 부담, 조금 더 나아가서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나왔다. 결국 답을 찾지 못했지만, 내 의지와 무관하게 어른이 되어가는 모든 사람이 한 번쯤은 고민해야 하는 주제였다. 개발협력사업을 하면서 실제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을 갈망하는 참가자도 있었다. “그들 내부에서 스스로 커뮤니티를 조직해서 그런 활동을 할 때 나는 이곳의 사람들과 함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는 외부인이라는 괴리감을 느껴 힘들었다”고 말을 이었다.


조금 의외였던 고민은 ‘왜 외국어로 소통할 때 모국어로 소통할 때보다 편한가’였다. 현장에서 외국어를 구사하며 소통하는 것이 어렵긴 해도 편하다는 것이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하면 소통에 오류가 생길 수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의도를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 최대한 정성스럽게 표현한다. 반면 모국어로 우리는 어렵지 않게 가장 섬세한 의미까지 전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한국어로의 소통에 부담을 느끼는 이유는 '소통의 요소가 언어뿐만은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한국에서 우리가 맺는 관계에서는, 내가 말하고 듣는 방식뿐 아니라 내 나이와 학벌 그리고 성별이 만드는 서열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관계에서 노력만으로는 풀어갈 수 없는 '불편한' 부분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공공기관과 NGO 양측 담당자들과 함께 오랜 시간 사업을 진행했던 다른 참가자는 공공과 민간은 서로 같으면서도 다르다고 설명했다. 양측의 언어와 논리가 완전히 다를뿐더러, 한쪽은 사업의 실현성을 고민해야 하고, 한쪽에서는 현장의 모습을 상상할 수밖에 없으니 서로에게  박탈감과 차이를 느낀다는 것이다. 그는 각자가 맡은 영역이 다르기에, 서로를 이해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소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을 맺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소통의 문제나 어려움이 생기면 그 문제를 다시 풀어내는 일이 험난할 것임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도망치기도 한다. 하지만 국제개발협력 분야의 업무는 그런 상황에서 끝까지 문제를 조율하고, 어려움을 들춰 조정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그들이 코디네이터(coordinator)라고 불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 그룹 이야기 결과물 ⓒ 발전대안 피다 



2. 우리의 다름, 다양성


우리 사회가 정말 다문화를 이야기할 준비가 된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 애초에 차별이나 비하의 뜻이 들어가지 않은 용어로 각광받았던 ‘다문화’의 의미가 무엇이었나. 지금은 결국 누구도 지칭하지 못하는 용어가 되어 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TV에 귀화한 외국인이 많이 나오고, 외국인들이 한국 땅에서 집을 구하고 살면 그게 다문화 사회일까? 중도입국 청소년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은 아직 한국어 교육 위주로 돌아가고 있고, 이주해 온 사람들은 언젠가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하고 있다. 아직도 한국인은 호스트, 외국인은 아무리 그래도 게스트라는 생각에 갇혀 있는 것이다. 우리를 묶어주는 정체성이 단일한 민족, 하나의 피였다면, 이제는 그것이 의미 없는 것임을 확인하고 있다.


한국에서 다양성과 혐오의 현주소를 보고 싶다면, 예멘 출신 난민 이슈를 참고하면 된다. 개인적으로 올해 6월 즈음 약 400명의 예멘인이 제주도에 동시 입국 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그 뉴스 댓글들을 읽은 뒤 속이 끓는 느낌에 일주일간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이슬라마포비아, 제노포비아에 대해서는 늘 관심이 있었지만 정작 그 민낯을 마주하자 어떤 첨언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몇 주 후 난민영화제에 갔을 때 오히려 태연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허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서야 혐오를 하는 사람은 일부에 불과함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 자체가 없었음을 깨달았다.


활동하고 있었던 중동지역학회에서 ‘예멘 출신 난민 이슈’에 대해 세미나를 기획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난민이 좋아서, 혹은 난민이 불쌍해서 그 세미나를 기획했던 게 아니었다. 우리는 너무 몰랐기 때문에 우선 알아야만 한다는 취지였다. 어떤 선입견이나 선동 없이 혐오에 대한 이론, 예멘 내전의 역사, 난민에게 가혹한 국제법에 대해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세미나를 준비했을 때의 나는 그 원대한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난민 반대에 분노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때의 나로 하여금 논문을 읽게 하고 세미나를 이어갈 수 있도록 했던 힘은 난민을 반대하는 사람에 대한 긴장과 분노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간에 포기해버릴 것만 같았다. 결국 세미나는 ‘난민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자’라는 메시지가 주가 되었고, 나는 결국 그게 옳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리는 난민수용을 찬성하거나 반대할 수 없으며, 우리 사회에 주어진 선택지는 어떤 방법으로 얼마나 속도를 내어 찬성할 것인가에 대한 것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이번 난민 이슈에서 이슬람 혐오, 난민혐오를 동시에 보았다. 몹시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의미의 ‘혐오’에는 다양한 층위가 있고, 실제로 때리거나 죽인 게 아닌데 혐오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제법 조약, 각종 인권협약이 주는 명예를 누려 왔던 우리가 정작 갑자기 찾아온 사람들에 대해 눈치 주고, 이기적인 불청객 취급하고, 가능한 최소한의 것을 주기 위해 애쓰고, 어쨌든 얹혀사는 처지니 구박받아도 할 말 없다는 논리를 펼친 것이 곧 혐오의 발현이다.


개인적으로 다양성이 평화와 반드시 양립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모여 사는데 잘 맞고 편할 일보다는 어색하고 부딪힐 일이 더 많을 테니 그렇다. 무언가를 뺏길 것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는 끊임없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성이 좋은 사람이든 싫은 사람이든, 이의가 있으면 말해야만 하고 표현하며 계속 고민해야 한다. 결국 다양성이 주는 이점이라는 것은 다양성을 거부하는 현실과 다양성이 필요한 이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조금씩 나아가는 것, 그 자체일 것이다.



기사 입력 일자: 2018-11-30

작성: 김지은 발전대안 피다 편집위원, 대학생 연합 중동 학회 '엘 네피제' 학회장/ kje198@naver.com


[1] 혼네와 다테마에는 '혼네', '다테마에' 이 두가지 단어를 합친 것으로, 개인의 본심과 사회적인 규범에 의거한 의견을 나타내는 말이다. 흔히 본심과 배려, 속마음과 겉마음으로 불린다. 일본인의 경우 자기 의견을 피력함에 있어서 이 두 가지를 구별하여 사용하기에 익숙하다. 

출처: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혼네와_다테마에 에서 2018.11.29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