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들[14호] 해외 구호에 기부를 많이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까?

2018-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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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구호에 기부를 많이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까?


[편집자 주] 이 글은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총서 12권 “기빙웰: 잘 받고 잘 주는 나눔의 윤리” 발간에 맞추어, 지난 4월 26일에 청년문화공간 JU 동교동점에서 열린 ‘나눔윤리 특별 교육, 해외구호에 관한 윤리적 질문들’에서 발표된 박종남 피움 편집위원(연세대학교 빈곤문제국제개발연구원 연구원)의 발제 내용을 발표자가 직접 요악한 것이다. 이 글을 통하여 피움 독자들과 함께 위 책에서 제기하는 해외 구호/국제개발 관련 윤리 이슈를 나누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 기빙웰 책표지 ⓒ 인터넷 교보문고 


지난 60년간 우리는 낙후된 사회를 근대화하면 필연적으로 빈곤의 문제가 소멸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럼에도 일부를 제외한 많은 개발도상국은 경제적 침체와 정치적 불안의 악순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러 증거들을 통하여 그간의 ODA는 자금을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투명한 시스템을 갖추고, 자금 지출을 자국 시민들에게 제대로 설명할 책임을 다하는 나라에서 그 효과가 긍정적으로 나타난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심각한 기술 부족, 허약한 국가 기구와 의회 시스템, 불충분한 법률 체계 등을 개선하는 방식의 구조 조정이 원조의 새로운 목표로 간주되기도 했다. 그러나 리델(Rodger C. Riddell)은 그의 저서 『Does foreign aid really work?』5장 전반에 걸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원조를 받는 측이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데는 관심을 가지지만, 

원조를 주는 측이 얼마나 현명하고 효과적으로 이를 제공해야 하는가 하는 점에는 관심이 있는가?”


리델의 질문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원조 효과는 이를 주는 쪽에서 얼마나 잘 전달 하였는지에 따라 결정될 수 있음을 뜻한다. 즉, 공여국의 역할을 질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지금은 개발협력이 빈곤을 감소시키고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모두 동의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ODA는 경제 성장을 목표로 시작되었다. 따라서 초기의 원조를 놓고 효과성을 논의할 때는 ODA가 경제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의 여부를 따져보는 것이 당연하였다. 그리고 경제가 성장하면 빈곤 감소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예를 들어, 루이스(Sir. Arthur Lewis)는 ‘이중경제모델(dual economy model)’ 개념을 통해 경제 성장과 빈곤 감소 원리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펼쳤다. 농업의 생산성은 토지의 생산성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농촌 인구가 증가하면 필연적으로 잉여 노동이 발생하게 되지만, 도시의 산업은 노동력을 투입한 만큼 발전될 수 있기에 농촌의 잉여 노동을 도시의 산업 노동으로 투입하면 국가의 부도 증가하고 빈곤도 감소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넉시(Ragnar Nurkes) 역시 국가의 부가 없으면 투자를 할 수 없고, 투자가 저조한 국가의 신용도는 낮아질 것으로 보았다. 넉시는 이러한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 투입이 필요하므로 ODA를 투자 재원 중 하나로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국가의 경제 수준이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개인의 빈곤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는 주장은 자본의 속성인 축적(accumulation)의 문제를 간과한 해법이라 비판할 수 있다. 자본의 속성 상 산업이 발전하고 국가 전체의 부가 증가하더라도 그 혜택은 골고루 공유되지 않는다. 따라서 원조의 실패를 주장하는 첫 번째 이유는 ‘경제가 발전하면 빈곤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가정’ 그 자체의 실패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자가 충분하다면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리델 역시 원조가 영향력을 발휘할 만큼 충분한 액수에 도달하면, 그리고 원조가 빈곤 감소 과정을 방해하는 주요 요소들-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과 광범위한 체계적인 제약-을 모두 바로잡는 방식으로 사용되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만일 이러한 가정이 사실이라면, 원조의 실패 원인은 ‘충분하게 지원하지 않은 것’으로 결론 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 ODA 규모대비 GDP 비율 ⓒ 박종남


위 그림에서 실선은 ODA의 규모를 나타내고, 점선은 GDP 대비 비율을 나타낸다. 1960년대 이래 현재까지 ODA의 규모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반면, GDP 대비 비율은 2000년대 초반까지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원조의 규모에서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은 공여국 GDP 대비 0.7%라는 기준에 관한 것이다. 이 기준에 관한 논의는 1958년 세계교회협회(World Council of Churches)에서 제안한 ‘공여국 GNP 대비 1%’가 시초로, 이 정도의 규모면 희망적일 것(much more hopeful)이라는 막연한 언급과 함께 제안되었다. 아마도 1948~1952년 미국이 지원한 원조 금액이 미국 예산의 약 1%였기 때문에 그렇게 제안되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이후 1964년 네덜란드 틴버겐(Tinbergen)에 의해 0.75%라는 수치가 제안되었고, 1969년 World Bank에서 제시한 0.7% 기준이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1970년대 이전의 상황에서 제시된, 그리고 어떤 구체적인 근거나 뚜렷한 결과에 기반하지 않은 이 기준을 왜 여전히 사용하여야 하는지 의문일 수 밖에 없다.  


규모의 문제만큼 누구에게 전달하는가의 문제도 중요한데, 리델 역시 이를 지적한다. 원조는 배분에 대한 예측이 가능할 때 효과가 커지므로 정작 필요한 곳에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는 대다수의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한 경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원조가 정말 필요한 곳에 가기 보다 원조 사업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희망하는 목적으로 투입되었을 경우 단기적 성과만 남게 되는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다.  


또한 부채 문제 역시 여전히 중요한 화두인데, 이는 1970년대 오일 쇼크 이후 원유 수입국들에게 한 대출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일부 국가의 부채 규모는 GDP 대비 50%를 웃도는 수준이었고, 따라서 이를 갚을 수 없는 부채의 덫(debt trap) 현상이 발생하였다. ODA를 자본의 이동이라고 본다면 부채 또한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에 주는 ODA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은 최근까지도 관찰된다. 2012년 전 세계의 ODA 규모가 약 1.3조 달러였으나 반대로 수여국에서 공여국으로 흘러간 금액이 약 3조 달러에 이른다(Global Financial Integrity 발표). 1980년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순 유출은 약 16.3조 달러 정도가 되는데, 이는 미국의 GDP보다 큰 금액이며 대부분 부채에 대한 이자였다.  따라서 ODA는 이자를 받는 것에 대한 적립금 정도로 봐도 무관하다는 모순적인 결론을 낼 수 있다.


대출금액이 워낙 크다 보니 부채 상환은커녕 이자도 다 갚을 수  없는 수준이다. 개인이 흔히 담보를 조건으로 대출을 받는 것처럼 상환 조건이 따르는데, 국가는 신용등급을 담보로 대출을 받게 된다. 대출을 상환하지 못해 신용등급이 낮아지게 되면 이를 높이기 위해 조치를 취하고 그 일환으로 ‘구조 조정’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구조조정은 우리도 익히 경험하였다. 그  대표적인 방식이 민영화였고, 이는 정부의 무능에 피로를 느낀 대중이 유능한 민간에 거는 기대는 훨씬 컸기 때문에 등장한 방안이다. IMF를 필두로 국제수지 적자 축소와 경제 효율성 제고를 위해 시장형 구조조정 정책이 아프리카와 남미 대륙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민간의 자율을 보장하자는 논리는 빈곤의 책임을 스스로 타파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확장되어, 보살핌보다는 스스로 이겨내는 것이 강조되었다. 이전의 빈곤을 설명하는 주류 이론 중에 하나였던 종속이론과 같이 착취와 불평등한 국제 질서 및 시스템에 대한 분석은 사라지고 빈곤의 원인을 개발도상국의 무능과 부패 때문으로 설명하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기 시작하였다. 자연스럽게 개도국에 책임과 의무를 부과하고 그에 따라 원조를 제공하는 방식, 즉 ‘조건부 원조’가 시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빈곤 현상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의 작동 원리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맥락, 즉 사람들 안에 존재하는 복잡성 및 동시에 일어나는 외부 세계와의 상호작용 등으로 인하여 그 실체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여기서 도덕적 원칙과 실질적 결과의 차이가 생겨난다. 즉, 아무리 의도가 옳다고 하더라도 의도한 결과가 실질적으로 옳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결과가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하여 의도가 잘못되었다고 볼 수 없는 혼란이 생기는 것이다. 비록 의도는 눈에 보이지 않고 결과는 보이기 때문에 판단의 준거는 ‘결과’일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원조와 빈곤에 관한 다양한 시각과 복잡한 흐름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성찰성’(reflexivity)이라고 생각한다. 지식과 현실 사이의 불안전하고 불확실한 관계를 폭로하고 그에 대한 성찰적 분석을 해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우리가 쉽게 가질 수 있는 세계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이를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 벗어나, 세계는 우리의 지식에 속박된 세계가 아닌 이탈과 불확실의 영역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기사 입력 일자: 2018-05-31


작성: 박종남 피움 편집위원, 연세대학교 빈곤문제 국제개발 연구원 / s803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