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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초이스[18호] 25년의 현장 기록, 통찰과 성찰 사이 ‘사람을 사람으로’ 저자 이상훈 선교사 인터뷰

2019-01-30
조회수 1874


25년의 현장 기록, 통찰과 성찰 사이

‘사람을 사람으로’ 저자 이상훈 선교사 인터뷰

▲ 인터뷰 후 책에 저자 서명중인 이상훈 선교사님 ⓒ 엄소희


‘국제 구호 개발 1세대’로 꼽히는 이상훈 선교사가 최근 책을 냈다. 그는 르완다, 우간다, 케냐,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현장경험만 25년에 이른다. ‘사람을 사람으로’라는 책 제목에서 그의 활동 철학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긴급구호’나 ‘국제개발협력’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분야 활동에 대한 경험과 철학을 나누는 도서는 다양하지 않은 편이다. 그나마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의 수기 정도만 종종 소개되는 정도라, 이 책의 출간이 더욱 반갑다. 르완다에서 최근 학교와 병원을 짓고 개관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그를 만나 책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나누어 보았다.


엄소희(이하 ‘엄’): 저와 제 주변 사람들에게 선교사님은 개발과 구호 분야 1세대로 오랜 시간동안 자리를 지켜주는 든든한 선배이자 모델, 그리고 멘토이신데요, 쌓아오신 시간과 경험에 비해 책을 늦게 내셨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책을 내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이상훈(이하 ‘이’): 사실 책을 쓸 생각이 없었다가, 최근에 대학 동기의 권유를 받아 그간 쓴 글들을 정리하고 편집하여 책을 내게 되었어요. 책을 쓸 생각이 없었던 것은, 글을 쓴다는 것이 참 무서운 일이거든요. 말은 공기에 흩어지지만, 글은 계속해서 남죠. 내가 생각이 바뀌더라도 내 글은 남아있고, 그 글이 반향을 일으키기도 하거든요. 그 반향이 늘 긍정적인 부분만 있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고요. 특히 이 ‘개발’ 분야는 특성상 말이 난무해서는 안되는 분야 중 하나에요. 이미 말이 너무 많은데, 그에 비해 실질적인 데이터나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드물어요. 남의 얘기를 반복재생하면서 굴러가는 것이 이 분야거든요. 그래서 글을 쓰는 것이 어렵고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살아본 부분만큼만 쓰자, 변할 가능성이 있는 부분은 열어두자. 하는 만큼, 해본 만큼, 아는 만큼, 겪어본 만큼만 쓰겠다’고 생각하면서 정리했어요. 개발에 대한 이야기 뿐 아니라 선교에 대한 생각, 그리고 개인적인 여러 가지 단상들이 모였는데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들이더라고요. 그래서 제목이 이렇게 나온 거고요.


엄: 기존에 썼던 글들을 엮으신 거군요. 그렇다면 실제 글을 쓴 전체 기간은 어떻게 되나요?


이: 거의 20년간 여기저기 보냈던 글이 합쳐졌죠. 예를 들면 간증문의 내용이 있어요.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가에 대한 글이 있는데, 그것은 94~95년 즈음에 작성된 것 같고, ‘피움’의 전신인 OWL에 냈던 글도 있어요. 대학 동기 홈페이지에 올렸던 영화감상문도 있고요. 그런 것들을 일관성 있게 편집한 거죠. 20여 년간의 생각들이 모인 거예요.


엄: 글에 담긴 생각이 일관적이어서 한 기간 안에 쓰신 글인 줄 알았어요. 20년간 쓰셨다니, 그간 얼마나 일관적으로 신념을 지켜오셨는지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이: 오락가락 많이 했죠. 그러면서 새롭게 깨닫기도 했고요.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에서 큰 줄기는 변하기 쉽지 않은 거 같아요. 저는 50대인데요, 앞으로 새롭게 무언가 발견되는 것이 없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이 바뀔 일은 거의 없을 거예요. 나이 들면 보수가 된다고 하잖아요. 생각이 경직돼요. 생각을 바꾸기 어려워지는데 안 그러려고 애쓸 뿐이죠.

 


선한 의도와 악한 결과: 우리가 정말 선했을까


엄: 책에서 다루셨던 내용들에 대해 좀더 질문을 드리도록 할게요. 주요한 메시지 중 하나가 ‘선한 의도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라는 것인데요, 많은 경험들 속에서 선교사님께서 느낀 ‘의도와 실제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20여 년간의 시간을 되짚어 보셨을 때, 그간 개발 현장에 진입하는 의도는 큰 변화가 없어도 현장에서의 실행은 변화가 꽤나 있었을 것 같은데요, 어떤 변화를 보셨는지, 그리고 그 변화를 어떻게 느끼고 계시는지요?


이: 맞아요. 선한 의도는 변치 않는 것 같습니다. 이 분야 일하는 사람치고 악한 사람이 없어요. 자기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쉬운 게 아니니까요. 선교와 개발의 역사는 맞물립니다. 이런 좋은 의도를 가지고 몇 백 년간 선교사들이 개발활동에 투입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선한 접근이 선한 결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의도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봐야합니다.


사람들이 보통 결과보다 동기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어요.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동기가 순수하면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데 비해서 동기가 악한데 좋은 결과가 나온 경우에는 훨씬 저평가하죠. 저도 그렇게 생각하던 사람이었는데, 이 일을 하면서 좋은 의도를 갖고 최선의 방법론을 이용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과가 악하게 가는 경우를 많이 본 거예요. 우리가 은폐하지 않았으면 더 많은 케이스들이 나왔을 겁니다. ‘선한 의도’였다고 해서 자꾸 (결과가 나빠도) 덮고 있어요. 아프리카 정부의 부패와 담당자들의 역량 부족, 안정적이지 못한 펀드, 의존적인 주민들 등등, 레파토리가 정해져 있죠, 변명처럼. 하지만 이건 비겁한 얘기예요. 저처럼 오래한 사람일수록 더 큰 책임이 걸려 있어요. 왜 선한 의도가 실현되지 않는지 조금 더 냉철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데, 이 책에서 은연 중에 지적하고 있는 것은, 정말 선한 의도였는가에 대해 회의한다는 거예요. 당신 정말 선한 의도였습니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거죠.


이 분야 사람들이 비교적 우리 사회에서 그래도 이타적인 사람들이 모인 건데, 이 사람들에게조차 완전히 이타성을 가지고 개인의 이기성을 배제할 수 있겠느냐 물어보면, 저 자신을 포함해서 인간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대표적인 것이, 여기에서 몇 년 일하다 보면 유학 갈 생각을 해요. 인간으로서 당연하고 그럴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유학을 가기 위해서 이 루트가 이용되기 시작하면, 이 일을 하는 목적이 오염되는 거죠. 본인이 그렇게 생각을 품고 있으면 본인을 바라보는 대상도 반드시 알게 된다는 거예요. 암묵적인 합의의 선이 생기는 거죠. 서로가 서로에게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이 정도에서 타협하자, 이렇게 되면 변화가 일어나겠냐는 거예요. 안되죠. 왜 일이 안되느냐, 서로가 적당한 선에서 이용하고 이용 당하는 사이가 되어있으면 본질적으로 한 배를 탔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한 배를 타지 않는 이상 운명공동체가 아니에요. 때가 되면 떠나는 사람이 되는 거지. 그런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자기 미래를 결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아주 단순한 거예요. 개발 영역의 젊은 친구들보다는 선교사들을 생각하면서 이 내용을 썼었어요. 개발 업계의 일은 오히려 명확한 지점들이 있거든요. 그 단체가 어떤 일을 하고 싶어하는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이미 영역이 정해져 있어요. 기술적인 한계 때문에 오히려 정직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평생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관념이에요. 우리 속에 여전히 상대를 대상화하는 시각이 있으면 선교가 안되거든요. 내가 주(主)이고 상대가 객(客)이면 자꾸 상대를 내 목적에 맞게 이용하게 돼요. 그 상태를 벗어나야죠. 이타적이라는 말만 하지 말고, 나와 상대가 구분이 없는 상태까지 가야 한다는 겁니다. 가족처럼 말이죠. 가족 간에는 손해가 나더라도, 상처를 받더라도 서로 끌어 안잖아요. 그런 이해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개발의 조각 맞추기: 큰 그림을 보는 눈


엄: 지금까지 ‘의도와 실제’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면 ‘목적과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같은 목적을 두고 있는데, 지난 20여 년간 방법은 계속 바뀌어 왔다는 이야기가 책에도 소개되는데요,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향성과 방법론에 대해 좀더 이야기를 해볼까요?


이: 지금까지 구호 활동을 이어오면서 방법론의 변화가 많이 있었는데요, 희한하게도 그 전체의 그림은 아무도 보지 않더라고요. 각각의 활동들에 나름의 체계가 있는데, 때로는 무너진 시스템을 복구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을 강화하기 위한 활동들도 있어요. 가만히 보니 대부분의 활동이 결국 시장경제로 귀결되도록 맞추어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것을 큰 그림이라고 생각하면 결국 시장경제가 답인가 하는 생각이 들죠. 이것은 세계화 문제와 이어집니다. 세계의 단일한 시장 안에 모든 공동체가 묶여 들어가는 것이죠.


그런데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사이의 차이가 이미 어마어마한데, 이것을 영구화하자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한 쪽에서는 로켓을 쏘아 올리는데 여기에서는 고무신 하나 만들기 힘들거든요. 우리가 하는 일 또한 시장경제라는 거대 시스템으로 바라보게 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또한 그 시스템을 만들고 영속하는 일에 동원되고 있더라는 거죠. 예를 들어 농촌 개발 사업으로 옥수수를 키우는 일을 한다고 해봅시다. 생산성을 높인다고 끝이 아니거든요. 시장으로 가야하는데, 시장에 연결하고 편입되는 과정이 결국 시장경제에 종속되는 것이거든요. 여기에 대해서 경제학자나 인류학자 일부는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해요. 그런데 과거의 공동체성이나 자연과의 조화를 어디까지 이룰 수 있을까요. 한 번 돈 맛을 본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한 번 핵가족으로 구성된 가정이 다시 대가족을 이룰 수 있을까요? 이미 진행된 일, 경험한 일은 돌이키기 어려워요. 불가피하다면 지금의 현재를 기준으로 앞으로 가야할 방향에 대해 현실적인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해요. 무릉도원 같은 완벽한 이상이 필요한 것은 아니에요. 이상만 좇다 보면 오히려 동력을 잃게 되거든요. ‘더 나은 세상’이라는 것이 아주 조금 나은 세상이라는 것이지 확연히 다른 세상은 어려워요.


생각을 많이 할수록, 현실적인 부분을 돌아볼수록 비관주의자가 되기 쉬워요. 방향을 잡기 위해서는 약간의 비약이 필요합니다. ‘회복된 세계’라는 것에 대해서요. 전쟁과 갈등이 넘치는 현사회에서 우리가 관계를 회복하고 사회를 회복하여 다다를 수 있는 세계가 있다고 믿는 것이죠. 저는 인간이 시장경제가 전제하는 것처럼 완전히 이기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 노벨평화상을 탄 콩고의 데니스 박사님을 보세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돕고 있거든요. 자신의 이기심만을 채우는 인간을 생각했을 때는 그냥 미친 거죠. 하지만 이 세상에 분명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거든요. 인간은 그만큼 복잡다단함을 가진 존재예요. 저는 이런 사람의 본성을, 그리고 여기에서 파생되는 사회의 문제를 단순화해서 이야기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찰나와 영원에 대하여


엄: 의도된 구성인지는 모르겠으나, 책의 도입과 말미에 같은 키워드가 제시되는데요, ‘영원’이라는 단어입니다. 여는 글에서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세계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프리카 사람들은 영원을 기반으로 현실을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해주셨고, 닫는 글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원을 살겠다’라고 직접 남기셨는데요, ‘영원’이라는 단어에 특별한 의미를 담으신 것이 있나요?


이: 같은 단어를 쓰고 있지만 개념은 조금 다릅니다. 그래도 일맥상통하는 것은, 인간에게 공통된 믿음이 있다는 것이죠. 우리의 삶이 여기에서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이요. 현실에서 더 열심히 살면서 의미를 구하려 하고, 막연한 것을 실현하는 것을 꿈꾸는 것들이 모두 한시적인 인간의 삶 너머에 무언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거든요. 삶 너머에 있는, 그 다음을 바라보지 않으면 여기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책의 글 중에 영화 매트릭스에 대해 쓴 글이 있는데요, 저는 이 영화가 기독교적인 세계 안에서의 모순과 인간의 선택을 잘 해석했다고 생각합니다. 신은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줬어요. 하지만 자유 의지로 선택하고 나면 그 이후의 결과와 영향에 대해서는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죠. 나의 자유 의지와 결정, 그리고 그로 인한 깨달음이 인간을 더 높은 차원으로 사고하게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신이 우리에게 준 가치이기도 합니다. 자유를 포기하고 속박 당하는 삶을 살 수도 있어요. 이 글은 제 대학 동기들, 정치외교학과 친구들에게 쓴 글이기도 합니다. 인간이라면, 이렇게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면서요. 특정한 대상을 떠올리며 썼기 때문에 독자들은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친구들은 읽자마자 이해하겠죠. 같은 시기 수학하고 시대의 변화를 바라보고, 나름의 방법으로 돈을 벌고 사회에 기여하고 있거든요. 친구들은 제게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제가 사는 방식에 대해서요. 제 삶의 기준이자 방식을 ‘자유 의지’로 설명하려 한 거예요. 제게 자유는 하나님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것, 그 안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것이에요. 제가 생각하는 인간은 그런 존재입니다.



개발 현장은 고정적인 시공간의 한 장면이기보다는 입체적이고 가변적인 유기체에 가깝다. 현장활동가들은 일이 명확하고 원칙이 뚜렷하더라도 시시각각 튀어나오는 변수와 사건에 대응하다가 진을 빼기 일쑤다. 어쩌면 이 개발 현장에 선교사를 비롯해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이 때문일지 모른다. 이 일에는 견고한 믿음이 필요하다. 나의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 논리적이지 않은 결과들에 때로는 무력함을 느끼기도, 나를 둘러싼 사람과 환경에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 남아 목적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의지’와 ‘믿음’이 필요하다. 나 스스로를 다잡는 의지, 내가 향하는 방향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내 몸과 정신을 지키기도 버거운 곳이 현장이다.


이상훈 선교사의 책 ‘사람을 사람으로’는 개발 활동가의 현장 보고서이자 발전의 모습에 대한 고민이 담긴 에세이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절절한 신앙 고백이기도 하다. 인터뷰를 마치고 더욱 깊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믿음-신념-활동이 견고하게 연결된 일관성 있는 삶이었다. 현장을 꿈꾸는 개발 분야 꿈나무들, 현장에서 수없이 흔들리는 활동가들, 그리고 신앙인들 모두에게 자신을 향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기사 입력 일자 : 2019-01-31


작성 : 엄소희 발전대안 피다 편집위원, 키자미테이블(Kijami Table) 공동창업자/ baram.sophi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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