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들[17호] 물이 차오른다, 가자 - 영화 <물의 도시> 리뷰

2018-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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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차오른다, 가자
영화 <물의 도시> 리뷰


주변 사람들에게 ‘개발’의 이미지를 물으면 십중팔구 고층 빌딩이나 잘 뻗은 도로 따위를 이야기한다. 개발의 얼굴은 수천 가지인데 우리가 이렇게 획일적인 모습을 떠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어떤 기억 때문이다.


‘한강의 기적.’ 대한민국의 급격한 경제 성장에 대한 흔한 비유다. 구불구불한 도로가 말끔히 포장된 반듯한 도로로 바뀌고, 낮게 오밀조밀 붙어있던 가옥은 고층 아파트와 빌딩으로 변했다. 불과 수십 년 만에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것은 대한민국의 큰 자랑 중 하나다. 이런 자부심이 ‘개발’에 대한 고정적인 관념을 만들었다. 거대 자본 및 국가 주도의 건설과 토목 공사, 과거의 양태를 갈아엎는 환골탈태가 ‘개발’의 진리인 양 받아들여지고, 그것도 모자라 ‘개발’ 위에 ‘재개발’을 얹는다. 도시 곳곳에서 공사 현장을 쉽게 만날 수 있고, 선거철마다 외치는 지역 발전 전략은 뉴타운과 상업 지구 유치에 매몰된다. 가히 개발판 천지다. 개발에 대한 강박과 집착이 대한민국 전체를 휩싸고 있다.



▲ 물의도시 포스터 사진 ⓒ 박소현 감독


노량진수산시장의 재개발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물의 도시’는 대한민국이 가진 ‘개발’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노량진 수산시장에서는 ‘현대화’를 명분으로 신식 시장을 건설하고 구 시장 상인들을 이주시키는 재개발이 이뤄졌지만, 정작 수산시장의 상인들은 그 논의와 결정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다. 게다가 기존 시장 자리에 카지노 등의 시설이 들어온다는 계획이 발표되며 애초에 이 개발의 진의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깨끗하고 하얗게 빛나는 신시장과 어둡고 축축해 보이는 구 시장의 모습은 재개발 전후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 인위적인 개발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지우고 쌓여온 기억을 덮는지 또한 볼 수 있다. 자본이 앞세우는 화려한 이미지 뒤에, 사람이 있다. 수십 년의 수산시장 역사 안에 상인들의 삶과 지역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다. 폐쇄되고 나면 한 지역의 대명사와도 같았던 장소가 사진 몇 장으로만 남겨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재개발이 과연 무조건적인 선인지, 개발은 행복을 담보하는 행위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 '사람이 꽃피는 발전의 길 - 제8회 개발, 재개발 편' 감독과의 대화  ⓒ 발전대안 피다


한 인터뷰에서 감독은 ‘물의 도시’라는 제목에서 ‘물’이 의미하는 것이 한강, 즉 자연 지형적 물(水)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물건 및 자본(物)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영화는 그 중의적인 의미를 여러 각도에서 보여준다. 고층 빌딩이 솟은 한강 위 여의도의 모습과 물에서 사는 수산물을 판매하는 수산시장의 모습이 반복되는 가운데 노량진 수산시장은 정박한 배에 비유된다. 이 배는 또 다른 역사적 사실을 불러내는데, 대항해시대의 콜럼버스가 그것이다. 신대륙을 탐험하는 여정, 발견하는 탐험가와 발견되는 선주민, 개척과 착취의 역사는 현시대 개발의 시작점이자 원형이다. 영화에서는 개척과 개발의 동인이 ‘황금’이라 지적한다. 물욕은 사람 위에 물질을 덧씌우고, 모든 것을 수치화해 버린다. 번쩍거리는 첨단 도시도 자본과 권력의 힘으로 세워졌다 부서지기를 반복하는 황금 모래성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재개발과 이권을 둘러싼 사건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심각하거나 무겁지 않다. 카메라의 따뜻한 시선과 감성적인 내레이션 때문에 서정적인 느낌마저 든다. 대한민국 사회 안에서 재개발을 둘러싼 다툼은 이익이나 권력을 둘러싼 힘겨루기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결국 그 안에 있는 것이 ‘사람’이고 그 사람들의 ‘기억’을 지우고 쌓는 일임을, 우리로 하여금 다시 떠올리게 한다.


국내 곳곳의 현재진행형 개발과 재개발은 ‘개발의 경험 공유’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국제사회에까지 오르내린다. 단시간 초고속 성장의 비결이 무엇이냐 우리에게 묻는다. 개발에 대한 확고한 경험과 상을 가지고 있는 한국은 자꾸만 우리가 생각하는 개발을 개발도상국에 전달한다. 무의식중에 과거의 것과 현대의 것 사이에 우열을 매기고, 드라마틱한 외관의 변화만을 개발의 결과로 상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불도저로 일단 밀어버리고 시작하는, 지극히 한국적인 방식의 개발을 개발도상국에서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가. 밀어버린 자리에 세워진 철길이며 댐이 과연 현지 주민들에게 행복을 주었을까. 우리가 전달하는 ‘개발 경험’이 어떤 내용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다.


또다시 물이 차오른다. 키를 잡고 있는 우리가 향하는 그곳은 어디인가.



기사 입력 일자: 2018-11-29

작성: 엄소희 발전대안 피다 편집위원, 키자미테이블(Kijami Table) 공동창업자/ baram.sophie@gmail.com